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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포은 정몽주 사상과철학

cbh하늘 2010. 6. 9. 03:01

포은 정몽주 - 시.사상.정치외교에 뛰어난 ' 미래형 인물' 
[경기일보 200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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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을 기리는 방식과 시조 한 편

정몽주, 하면 떠오르는 시조가 있다. ‘단심가(丹心歌)’. 제목부터 선혈이 비친다.

칼 같은 기개와 절의가 서늘하다.

함께 떠오르는 개성의 선죽교(善竹橋).

우리는 ‘단심가’와 선죽교의 붉은 핏자국으로 그의 충절을 기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글은 곧 그 사람’, 이 시조야말로 정몽주(鄭夢周)의 한 압축이다.

저무는 왕조에 심장을 바친 고려사람, 포은의 삶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이로써 포은은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다 기운 왕조를 위해 기꺼이 생을 버린 포은의 절의는 변절의 일상화로 치닫는 이즈음 더 깊게 와 닿는다.
한 사람을 한 편의 시로 기리는 것은 특별한 추앙이다.

시인으로서도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그만큼 시문에 뛰어났으므로 포은은 대접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데 그는 또 시인 이상의 품을 지녔으니,

학자면서 정치 외교 능력까지 겸비한 ‘멀티형’의 큰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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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서원에서 1Km정도의 능원리 산3번지 문수산자락  포은 묘역>

 

저무는 고려왕조 향한 일편단심… 죽음으로 지켜

 

▲용인에서 돌아보는 삶과 죽음
포은의 묘소는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경북 영천 생인 그의 사후 거처가 왜 용인일까.

그것은 개성 풍덕에 수습한 묘를 이장할 때 그의 명정(銘旌)이 날아가

지금의 묘 자리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용인의 지력이 그만큼 셌나 보다.

하긴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라던가.

그 덕인지 용인은 정몽주라는 큰 인물과 더불어 능원리라는 마을을 두고 있다.
묘 앞에는 단심가와 포은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시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 역시 섬뜩했었다.

흑백의 선명한 가름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교훈의 날이 너무 퍼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1517년(중종 12) 세운 묘표에는 ‘고려수문하시중(高麗守門下侍中)’을 명시하여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포은의 뜻을 새겼고,

신도비에도 그의 충절과 높은 학식을 기리는 글(송시열)이 있다.


정몽주는 1337년에 태어나 1392년에 세상을 떠났다(시호 文忠).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고,  정몬주의 선조로는 의종 때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

간신들의 비방을 받고 자결한 정습명이 있어 핏줄의 내력을 짚어보게 한다.

‘포은(圃隱)’이란 호도 몸을 피할망정 뜻은 굽히지 않는 은둔사상과

은사(隱士)들의 철학을 환기한다.

태몽에서 비롯된 이름의 ‘몽’(몽란, 몽룡, 몽주로 바뀜)도 생의 함축같이 보인다.

그 때문인지 포은은 후에 꿈을 ‘이상(理想)’으로 보고 분석하는 등 앞선 사고를 보여주기도 했다. 
포은은 대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과 함께 공부했다.

장원 급제(공민왕 9년, 1360) 후 포은은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 여러 벼슬에 올랐고 많은 일을 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했으며,

5부 학당(개성)과 향교(지방)를 세워 교육진흥도 꾀했다.

이성계(李成桂)의 여진족 토벌 당시엔 종사관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1367년에는 예조정랑으로 성균관박사를 겸하면서

시문과 서화에 두루 뛰어난 학자의 면모를 발휘했다.

그때까지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밖에 없었는데,

유교 경전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설명한 것이다.

이색이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했으니, 학자로서의 위상도 짐작할 만하다.
그렇지만 포은은 죽음으로 더 빛나는 것 아닐까.

위화도회군 후 군정을 장악한 이성계를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 할 때,

정몽주는 역성혁명의 반대편에 섰다.

결국 1392년 4월4일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태종 1년에는 영의정 추증과 익양부원군에 추봉,

중종 때는 문묘에 배향되며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됨).

이로써 이성계의 조선 창건에 회유되지 않고 저무는 고려에 충절을 바친 정몽주는

영원한 이름이 된다. 일찍이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산간으로 피한 은사는 많았고,

그런 사연이 동양 사상을 풍부케 해온 역사 또한 길다.

하지만 최후를 알면서도 맞이한 포은의 죽음은 진정한 충과 절을 보여준다.

게다가 단심가와 선죽교가 극적 요소를 얹으니, 변절의 시대일수록 새겨볼 거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단심가’도 ‘하여가(何如歌)’가 있어 돋보인다.

이방원이 포은의 마음을 떠본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도 절묘한 바가 있다.

정권교체기면 잦은 등돌림을 보면서 씁쓸히 되작이곤 하니,

아니러니하게도 ‘하여가’ 역시 일종의 ‘애송’시조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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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 정몽주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118-1번지 충렬서원>

▲뛰어난 시품과 외교 능력

포은은 뛰어난 시인이자 외교가였다. 나랏일로 명이나 일본을 다닐 때도 늘 시와 함께였다.

포은은 36세부터 50세까지

명나라를 네 번(공민왕 21년, 우왕 8년, 우왕 10년, 우왕 12년)이나 다녀온다.

사신으로 또는 외교관으로 보통 90일은 걸리는 먼 길을 오간 것이다.

특히 세 번째 길은 명과의 관계가 불편한 때라 기피할 만한데도

“임금의 명은 물불을 피할 수 없다”며 나섰다고 한다.

이리하여 포은은 세공면제를 이끌어내는 등 고려의 입지와 국익을 높이는 외교능력을 발휘했다.

그때마다 쓴 시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당시의 포은 시를 보고 정도전은 다양한 주제와 작품의 뛰어남을 평가했고,

이색은 문화교류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시사(詩史)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전쟁에 나가서도 포은은 시를 놓지 않았다.

함주의 종사관 참전 시 아우의 서찰을 받고 지은 시

(‘申辰仲秋有懷’)에는 객지에서의 애환이 잘 나타난다.

 

功名富貴非汝事 부귀공명이 너의 일이 아닐진대
客路年年有底期 객지생활 해마다 무슨 기약 있는가
明年何處逢明月 내년에는 어디서 밝은 달을 볼는지
獨坐南窓自詠詩 남창에 홀로 앉아 스스로 시를 읊네

 

추석에도 백발의 어머니, 가족과 함께 하지 못 하는 포은의 심정이 절절하다.

이런 시들은 당대 현실을 온 몸으로 살아낸 그의 삶과 자세를 보여준다.

그는 어떤 위험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시는 이런 길에 함께 하는 포은의 좋은 벗이자 위안이었을 법하다.
일본에 갔을 때도 포은의 시는 큰 힘이 되었다.

뛰어난 말솜씨로 고금의 교린 예를 이해시키는 포은의 인품과 학식에 탄복한 상대방이

후한 대접을 했는데,

그의 시에 놀라 교유를 청한 승려들에게 시(13편이나)를 써주며 원활해진 교감 덕이었다.

오죽하면 승려들이 포은에게 날마다 경치 좋은 곳으로 구경 가기를 청했다고 한다.

이로써 포은은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도 데려올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외교적 능력과 함께 시의 힘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가 아닐 수 없다.


포은은 풍류도 꽤나 즐긴 듯하다. 한번은 크게 놀았던지

 ‘집에 돌아가면 돈 쓴 것 부끄러워 말라’는 시구가 나온다.

이어 나오는 ‘새 시를 넉넉하게 얻어 금낭에 가득하다(剩得新詩滿錦囊)’는 시구는

포은의 도저한 풍류와 낭만을 보여준다.

‘금낭’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올 때면

시주머니에 시구를 가득 넣어왔다는 당나라 시인 이하의 인용으로,

포은의 기질과 풍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니 허균이 포은을 일러 ‘풍류가 호탕’하고 문장도 ‘호방걸출’하다고 평가했지 싶다.

‘포은집(圃隱集)’에 총 252제 315수의 한시가 전해지고 있어

포은의 시적 높이와 넓이를 가늠하게 한다.

▲너른 폭과 감각의 미래형 인물

책 좀 읽은 사람이면 어떤 명저나 사상의 자기화가 얼마나 지난한지 잘 안다.

시 쓰는 사람 역시 우리네 삶과 세계의 맞춤한 형상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그런데 정몽주는 주자학의 자기정립이며 시문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에까지 탁월했다.

나라의 요청에는 험한 길 마다않고 나가서 국익을 높이고

새로운 흐름을 읽는 등 국제적 마인드도 갖췄다.

또 앎의 실천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여민동락’도 도모했으니,

포은에게서 새겨 담을 정신의 폭이 상당히 넓다.
시의 힘을 다시 본 것도 즐거운 발견이다.

포은의 시가 외교에도 도움이 된 것은 상상력이 중요한 지금 의미가 더욱 크다.

중국 지도자들도 외국 정상과 만날 때면

전통시의 인용으로 문화적 자부심을 드러내면서 대화에 격조까지 얹지 않던가.

문화교류에서도 시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시로 마음을 더 열고 대화를 나누면 창의력에도 좋은 자극이 된다.

 
다시 보는 정몽주는 이 시대에 필요한 큰 인물이다.

새로 일어나는 명나라의 세를 읽고 신속히 대처한

국제적 감각이나 외교 역량은 지금도 절실하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에 미국까지 둘러싼 우리의 입지를

역으로 이용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남기 힘든 지경이라니 말이다.

경기도 역시 지역적 특성을 활용하기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은 정몽주야말로

우리 지역에서 더불어 즐거운 세상 만들기에 좋은 본이라 하겠다.


                                                           정수자 / 시인·문학박사

 

 

       <정몽주 묘소에서 본 안산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나란히 교차하고 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쓰러져가는 고려왕조 말기에 태어나 충효인의로 일관된 삶을 살아왔으며 불의 불충과 타협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절의를 지킨 충효사상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을 받아오고 있다. 이성계 일파를 견제, 숙청하려다 개성 선죽교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56세로 생애를 마친 만고충신 정몽주의 묘소와 사당은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자락에 있다. 죽전에서 광주로 가는 신도로를 타고 고개를 넘자마자 옛길로 들어서면 바로 찾아갈 수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깊은 산골처럼 느껴졌으나 분당과 수지에 아파트가 들어선데다 입구 쪽에 수지와 광주를 연결하는 준 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바람에 도시 안으로 바싹 들어와 있는 형국이다. 3년전 수종개선작업을 벌이느라 울창한 수목을 베어내 허전하더니 최근 다시 옛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경북 영천군 임고면에도 그의 덕을 기리는 임고서원이 있어 지금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1361년(공민왕10년) 24세때 과거를 보아 초장, 중장, 종장 3차례에 걸쳐 모두 장원급제한 천재로서 흐트러진 국정을 바로 잡으려고 심혈을 기울인 정치가였다. 또한 조정이 최영의 친원파(親元派)와 이성계의 친명파(親明派)로 갈라져있던 고려말 상황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오가며 국익을 위해 큰 공을 세운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에 통달해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뿌리’로 추앙받은 학자이기도 했다. 정몽주는 영일정씨 운관과 영천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어머니가 난초화분을 받는 꿈을 꾸고 났다고 하여 처음 이름은 몽란(夢蘭)이라고 지었다. 몽란이 자라서 9살 때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용이 배나무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놀라서 깨어보니 몽란이 배나무에 올라가 놀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바꾸었다고 전한다. 몽주라는 이름은 관례를 치를 때 지은 이름이며 그의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유학을 깊이 연구하고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어 37세때 요즘의 서울대 총장격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올랐다. 당대의 최고지성인 목은 이색으로부터 “그의 말은 이(理)에 닿지 않음이 없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정몽주는 이성계보다 두 살 아래로 두 사람은 외적이 침입했을 때 함께 일한적도 있었다. 공민왕21년 종사관(從事官)으로 이성계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였고 우왕3년엔 조전원수(助戰元帥)로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함께 물리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정몽주의 정치외교적인 능력을 존경했고 정몽주도 이성계의 뛰어난 전략과 그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 당시만해도 두사람은 서로를 존경하고 나라의 부흥을 위한 협조자로서 가까운 사이였었다. 더욱이 명 태조 주원장이 중국대륙을 휘어잡고 쇠퇴기에 들어선 원나라를 몽골초원으로 밀어내고 있는 상황에서 줄타기외교를 벌이는 고려의 입장을 감안, 친명파인 이성계의 노선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세력이 커지면서 1388년(우왕14년)철령 이북의 우리영토까지 내놓으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오자 최영이 중심이 되어 요동정벌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를 탐탁치않게 생각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으려는 원대한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위화도 회군에 이어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 일파는 최영장군 등 수많은 인물을 숙청하고 임금까지 갈아치웠다. 당시 사회개혁이라는 명분에 두사람은 잠시 협력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이성계 일파가 잇달아 왕을 갈아치우는데다 우왕 창왕 부자를 살해하는 등 고려왕조를 뒤엎을 야욕을 드러내자 정몽주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숙청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하고 만다.,
훗날 형제들을 죽이고 태종이 된 이방원이 포은을 설득하기 위하여 술자리에 초대, 하여가(何如歌)로 포은의 마음을 떠본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때 정몽주는 다음과 같은 단심가(丹心歌)로 자신의 결심이 변할 수 없음을 밝힌다. 이 자리에서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할 마음을 굳히게 된다. 결국 포은은 이성계의 동정을 탐색차  찾아보고 귀가하는 길목, 선죽교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성계 일파들은 고려의 충신을 살해하고도 반역죄를 지어 죽였다고 보고하고 피살된 정몽주의 목을 다시 베어 거리에 매단다. 그의 시신을 방치하고 시신을 치우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송악산 스님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풍덕군(豊德郡)에 묘를 만들어 주었다. 고려를 지탱하던 두 기둥 최영과 정몽주가 쓰러지자 이성계는 3개월후 조선왕조의 태조로 등극한다. 그후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권력 장악에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자식들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선덕왕후 강씨의 소생 방번과 방석이 죽자 이방원의 행위에 치를 떤다.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 칩거하면서‘노여움의 세월’을 보낸다.  형인 정종(正宗)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뒤늦게 왕권강화와 흩어진 민심수습에 나서게 된다. 그는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충성심을 신하들에게 강조하게 되고 아이러니컬하게도‘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정몽주’를 복권시키게 된다. 1401년(태종 1)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한다.나아가 풍덕에 있는 그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에 이장하는 것까지 허락한다.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가 뒤따르는 가운데 유골을 상여에 메고 고향 영천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용인시 모현면을 지날 때였다. 이때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상여 행렬의 맨 앞장에 세운 명정(銘旌)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의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명정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다시 날아가기를 반복하더니 지금의 묘소 옆자리인 이석형 묘(손녀사위)가 있는 자리에 떨어졌다고 한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살펴보던 후손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후손들은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구나” 감탄하면서 고향까지 갈 필요 없이 그곳에 안장(安葬)하기로 하고 땅을 팠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하관(下棺)은 할 수가 없었다. 몇몇 인부들에게 광중을 지키도록 하고 먼 행렬에 피곤한 후손들과 유림의 제자들은 곤한 잠이 들었다. 여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

그때 한 사람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몽주의 손녀였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친정집보다는 시댁과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서 그 자리에 욕심이 생겼다. 숙소에서 살짝 빠져 나온 그녀는 독한 술과 맛있는 안주를 준비하여 광중을 지키는 인부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척 하면서 술과 안주를 권하였다. 잠시후 인부들은 잠에 골아 떨어졌고 그녀는 묘 밑에 있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밤새 부었다. 다음날 정몽주 선생을 모시려고 보니 파놓은 광중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명당인 줄 알았더니 물이 나는구나” 아쉬워하면서 옆 자리에 있는 똑같은모양의 명당으로 옮겨 그 곳에다 모셨다. 이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야사(野史)로 전해오지만 충신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하늘이 점지해준다는 우리의 풍수지리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그후  포은의 후손들은 현종 때 우의정에 오른 9대손 정유성(鄭維城)과 판서 2명이 있었을 뿐 벼슬길로 진출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포은의 후손들은 포은의 손자라 하여 극형을 받을 것도 형이 감형되는 등 조선왕조의 회유책으로 많은 배려를 받았으나 오히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힘쓰는 가풍을 만들어 왔다. 그의 후손중 극형을 면한 인물은 포은 정몽주를 봉사(奉祀)하던 손자 정보(鄭保)이다. 그는 1456년(세조2년) 사육신(死六臣)사건에 연루된다. 그는 수레에 묶여 몸을 찢어 죽이는 환열형을 받았지만 ‘정몽주의 손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세조가 사형을 중지시키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2백년후 선조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어 지관들이 정몽주의 묘를 명당으로 지목하였으나 선조가 “충신이 묻힌 자리를 파낼수는 없다”고 제외하여 파묘를 면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명당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는가. 명정이 떨어졌다는 묘소 옆자리엔 후에 손녀사위인 저헌 이석형이 묻혔고 손녀 자신도 그 자리에 들어갔다. 그후 연안이씨인 저헌선생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였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함께 조선의 삼대 명문중의 하나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며 이석형의 후손들이다. 이석형의 4대 손자부터 발복하여 우리 역사상 한문학의 대가이며 선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이명한(李明漢)이 인조 때 대제학을 했고 손자 이일상(李一相)이 효종 때 대제학을 하는 등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또 이석형의 5대손 이귀(李貴)는 인조반정의 공을 세워 연안이씨 가문을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 되었고 그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연안 이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총 250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했고 정승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각각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으로 위세를 떨쳤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정몽주 묘소와 손녀사위 이석형의 무덤은 명당을 이루는 4개의 종류중 하나인 유혈(乳穴 ·여자유방과 비슷한 모양)에 속한다. 그것도 보기드문 쌍수유혈(雙垂乳穴 · 두개의 늘어진 유방 명당)이다. 하나의 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또 하나의 유혈이 있어 마치 처녀 젖가슴 두개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풍수 문외한이라도 “명당이란 이런 것이구나”느낄수 있는 곳이다. 흔히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석형의 묘소가 후손 발복이 많았다 하여 더 좋은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때 포은의 절개를 지켜 벼슬을 멀리한 후손들이 발복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포은도 그러한 것은 원치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저 국민의 존경을 받는 그 자체가 가장 큰 복이 아니겠는가. 다행히 수지-죽전 신도시에서 광주로 이어지는 신도로가 묘소주변을 파손하거나 가로 지르지 않고 앞쪽으로 지나갔다는 점이다. 명당은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퍼온글

출처 : 창산초등학교 총동창회
글쓴이 : 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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