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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명 조식

cbh하늘 2010. 6. 9. 02:58

남명(南冥) 조식(曺植)

 

 

 1.남명선생 일대기(南冥先生 一代記)

 2.남명선생(南冥先生)의 사상(思想)

 3.덕천서원(德川書院)

 4.산천재(山天齋)

 5.뇌룡정(雷龍亭)

 6.산해정(山海亭)

 7.세심정(洗心亭)

 8.시(詩) 부(賦)

 9.상소문(上疏文)  1. 단성소  2. 무진봉사



1. 남명선생 일대기(南冥先生 一代記)

선생의 휘(諱)는 식(植), 자(字)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남명은 선생의 호(號)이다. 선생의 증조부 안습(安習)은 생원이었는데, 이 때 비로소 서울로부터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조부 영(永)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가세가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겠다. 부친 언형(彦亨)이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게 되고, 숙부 언경(彦卿)도 문과에 급제하니 이 때부터 가세가 떨치게 되었다.

선생은 1501(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내다가, 7세 때부터 부친의 임지로 따라다녔는데, 그 시절에 정치의 득실과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눈여겨보게 되었다. 19세 때 산 속에 있는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조광조(趙光祖) 등의 죽음을 들었고, 또 숙부 언경도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어진 사람들이 간신 배에게 몰려 경륜을 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슬퍼하였다.

25세 때 과거를 위하여 절간에서 공부하다가,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이 "벼슬에 나아가서는 이룬 일이 있고, 물러나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도 이룬 일이 없고, 물러나 있으면서도 아무런 지조가 없다면, 뜻을 둔 것과 배운 것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구절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30세 때부터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37세 때 어머니를 설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38세 때 이언적(李彦迪) 등의 천거로 헌릉(獻陵) 참봉(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5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이림(李霖), 곽순(郭珣), 성우(成遇) 등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화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벼슬할 뜻을 버렸다.

48세 때 고향 삼가현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48세 때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 51세 때 종부시(宗簿侍) 주부, 55세 때 상서원(尙瑞院) 판관(判官), 같은 해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의 상소 중 "대비(文定王后)는 진실로 생각이 깊지만 궁궐 속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殿下)는 돌아가신 임금의 어린 고아일 따름입니다."란 구절은 조야(朝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명종(明宗)은 남명의 글이 공손치 못하다 하여 처벌하려 했으나, 산림처사가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책잡아 처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부당한 조처라는 조정 신하들의 변호로 무사하게 되었다. 이 때 벌써 선생의 명망은 조야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산림처사를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임금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온갖 부조리가 만연하던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선생의 과감한 직언은 산림처사의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61세 때 지리산 아래 덕산(德山)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65세 되던 해 문정왕후가 죽고 곧 이어 윤원형이 관직에서 쫓겨나자, 을사사화 때 유배되었던 선비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다시 임금으로부터 부름이 있자, 선생은 조정도 조금 맑아졌고 임금의 교지(敎旨)도 거듭 내리니 한 번 가서 군신의 도리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울로 가서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을 독대하였다. 명종이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선생은 '정치 제도를 혁신할 것, 인재를 등용하려는 성의를 보일 것, 정치의 근본이 되는 임금 자신의 학문에 힘쓸 것 등'을 건의하였다. 조정에는 윤원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축출되고 어진 사람들이 복귀하여 명종이 비로소 직접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평생토록 쌓은 학문과 경륜을 한 번 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종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무슨 일을 할 만한 임금이 아님을 간파하고는 서울에 간 지 7일만에 곧바로 돌아왔다.

67세 되던 해 어린 나이로 새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가 즉위 초에 두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8세 때 역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역대 임금들이 나라 다스림에 실패한 사례를 지적하고서, '나라 다스림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 자신이 학문과 인격을 닦는데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어린 선조가 정치를 잘 해 낼 수 있는 바탕을 닦도록 간언 하였다.

72세 때 선생은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임종시에 모시고 있던 제자 김우옹(金宇毋)이 "명정에 어떻게 쓸까요?"라고 물으니 선생은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곧 예관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대사간을 추증하였다. 이어 광해군 때에는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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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명선생(南冥先生)의 사상(思想)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된 이후 그 이론적 탐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꽃피울 무렵에 생존하였던 실천성리학의 대가였다. 즉 고려 말기 안향(安珦, 1243-1306) 등에 의하여 전래된 성리학이 조선 시대에 들어 그 학문적 깊이가 더하여 갔던 바,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에 의하여 실천적 성향이 강하게 뿌리내리는 한편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이언적(李彦迪, 1491-1553) 등에 의하여 실천적 측면과 아울러 이론적 측면도 중시되어, 16세기 중반기에 이황(李滉, 1501-1570), 이이(李珥, 1536-1584) 등에 의하여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도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따라 성리학의 이론에 대하여 체계적이고도 깊이 있게 탐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당대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는 가지지 않은 채 이론에만 몰두하는 학문의 폐해를 예견하면서, 오직 그 이론을 체득하여 몸소 실천하는 것만이 학자의 바른 태도라고 보기에 이른다. 요컨대 선생은 자칫 공허하게 될 소지가 다분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사상은 모두 이 '사회적 실천'에 귀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유학이 갖고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학의 핵심 명제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것도 '자신의 수양을 전제로 한 현실세계의 구제'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 '사회적 실천'지향의 사상은 자신의 수양에 관련되는 것과 현실 세계의 구제에 관련되는 것으로 구분해서 볼 수있는 바, 주지하고 있는 '경(敬)'과 '의(義)'가 바로 그 두 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경'과 '의'는 주역(周易)에 있는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 것이 그 출전이다. 송대(宋代)의 성리학자들이 특히 이 가운데의 '경'을 적출 하여 심성 수양의 요체로 삼았던 것인데, 선생은 이 둘『敬義』를 다 뽑아서 '경'은 내적 수양과 관련시키고 '의'는 외적 실천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산천재의 벽과 창문 사이에 이 두 글자를 써 두고서, '우리 집에 경 과 의라는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일월이 있는 것과 같아서 영원토록 바뀌지 아니할 것이니, 성현의 온갖 말씀이 모두 결국은 경과 의라는 이 두 글자를 넘어서지 않는다"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은 마음을 수양하는 요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선생은 마음을 수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꼭 유가(儒家)의 주장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장자(莊子)』에 나오는 '南冥'을 자신의 호로 삼고 또『장자』에 나오는 '시거이룡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히 침잠해 있다가 우뢰같은 소리를 낸다)'라는 말을 따다가 '뇌룡정(雷龍亭)'으로 강학(講學)하는 장소 이름을 삼으면서까지, 양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크면서 질적인 면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경'을 통하여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크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선생을 일컬어 '천 길 벼랑처럼 우뚝한'기상을 지녔다고 하는 것이다.

익힌 학문을 사회적 실천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내적 수양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기에 '경'을 내적 수양의 방법으로 중시하는 한편, 사회적 실천을 위한 가장 절실한 것으로서 선생이 제시한 것이 바로 '의'이다. 선생이 항상 차고 다니는 칼에다 새긴 글이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는 것에서 내적 수양을 통한 사회적 실천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다. 주역에서 말한 '直'과 '方'을 이 칼에 새긴 글에서 '明'과 '斷'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바, 이는 경전을 재해석하여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자기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기록한 글에 두루 보이는 민중 세계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그 처지를 대변하고 나서는 적극성 등에서도 선생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거니와, 선비가 해야 할 것으로서 음양, 지리 의약 등은 물론 활 쏘고 말달리는 것 등의 공부도 유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한 점에서 선생의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의 철저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제자인 김우옹에게 "장부의 거동은 중후하기가 산악과 같고, 만길 절벽같이 우뚝하여야 한다. 때가 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허다한 사업을 이루어 내어야 한다. 3만 근의 무게가 나가는 쇠뇌는 한 번 발사했다하면 만 겹의 견고한 성도 무너뜨리지만 생쥐를 잡기 위해서는 쏘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 선생의 분명한 출처관은 물론, 내적인 수양과 함께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중시했던 점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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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덕천서원(德川書院)

1576년에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1609(광해군 1년)에 덕천서원 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을 배향하여 향사(享祀)와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에 지방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祀), 경의당(敬義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신문(神門), 시정문(時靜門), 고사(庫舍) 등이 있다. 숭덕사는 3칸의 사우(祠宇)로서,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의당은 5칸으로 된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된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고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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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산천재(山天齋)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61세 되던 1561(명종 16년)에 건립되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선생은 이곳에서 오건(吳健), 정구(鄭逑) 김우옹(金宇毋), 최영경, 곽재우(郭再祐), 조종도 등의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유물로는 고서(古書) 다수와 남명집 목판 약 100매가 보존되어 있으며, 기와 중에는 달력 4(1576)년 의 명(銘)이 있는 것도 남아있다. 산천재의 기둥에는 선생이 이곳에 처음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 적의 심경을 읊은 다음의 시가 조련으로 붙어 있다.



德山卜居

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긱有餘

덕산에 살 곳을 잡으며

봄 산 어느 곳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요?

천왕봉이 상제와 가까워 사랑스럽네.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나?

은하(銀河) 십리 먹고도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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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뇌룡정(雷龍亭)

선생이 48세 때,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토동(兎洞:선생이 태어난 곳)에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뇌룡이라는 말은 장자에 나오는 "시거이룡현, 연묵이뇌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61세 되던 해 산천재로 옮겨갔다. 계부당은 없어졌고, 뇌룡정은 1900년대 초에 허유(許愈) 등에 의해서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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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산해정(山海亭)

선생은 31세 때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에 산해정을 지어 학문 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쓰다가 48세 때 삼가로 돌아갔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산해정을 확대하여 서원(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어 1609년(광해군 1)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68(고종 5년) 훼철된 뒤에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고 사림의 공의로 산해정 만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산해정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어있다. '산해정에 대를 심으며'라는 제목의 다음 시는 산해정에 기거할 때의 선생의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種竹 山海亭

此君孤不孤

髥未則爲隣

莫待風霜看

湱湱這見眞



대나무가 외로운가 외롭지 않은가?

소나무와 이웃이 되었네

풍상 치는 때 보려고 하지 말게나

살랑거리는 모습 속에 참된 뜻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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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심정(洗心亭)

세심정은 선생의 제자인 최영경 등이 중심이 되어 덕천서원을 지을 때에 함께 지었던 정자로 역시 선생의 제자인 하항(河沆)이 주역에 나오는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聖人洗心)'라는 말을 취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 현재의 정자는 그 후 여러 번 개축하여 본 모습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재전 제자인 하수일이 지은 세심정기에 정자를 지은 내력이 자세히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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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詩) 부(賦)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

請看千石鍾 非大 구 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여보게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큰 힘 주어 두들지 않으면 참 소리 듣지 못하오.
정녕 두류산을 닮으려나,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德山卜居

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有餘

봄 산 어느 곳엔들 芳草 없으랴만,
다만 천왕봉이 하늘나라에 가까운 걸 사랑해서라네.
백수로 돌아와서 무얼 먹을 건가?, 은하수 맑은 물을 내 언제 다 마실까?
 


 

山中卽事

從前六十天曾假 此後雲山地借之 
猶是窮塗還有路 却尋幽逕採薇歸

日暮山童荷鋤長 耕時不問種時忘
五更鶴 驚殘夢 始覺身兼蟻國王

이전의 육십 년은  일찍이 하늘이 빌려 준 게고, 
앞으로 구름 낀 산에서 사는 건 땅이 빌려준 거라네.
막다른 길에도 또다시 길 있나니,
그윽한 오솔길을 찾아 고사리 캐어 돌아온다네.

해지는데 산골의 아이 호미를 메고 서서,
김맬 때도 묻지 않고 심은 때도 잊어버렸네.
오경의 학 울음소리에 새벽 꿈을 깨자, 
비로소 몸이 개미나라 왕을 겸했다는 걸 알았다.
 

청학동(靑鶴洞)

獨鶴穿雲歸上界 一溪流玉走人間
從知無累蒜爲累 心地山河語不看

한 마리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 나라로 올라갔고, 
구슬이 흐르는 한 가닥 시내는 인간 세상으로 흐르네.
누(累)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산하를 마음으로 느끼고서 보지 않았다고 말하네.
 

원천부(原泉賦)

惟地中之有水     땅속에 물이 있는 것은, 
由天一之生北     천일(북극의 신)이 북쪽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本於天者無窮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다함이 없나니,
是以行之不息     이 때문에 쉬임 없이 흐르는 것이다.
徵一泉之 沸     한 샘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면,
異杯水之 覆     길가에 고인 물과는 다르다.
縱初原之涓涓     애초에는 졸졸 솟구치는 물에 불과하지만,
委天地而亦足     천지를 다 적셔도 넉넉하다.
非有本則不然     근본이 없다면 그렇지 아니하리니,
類人身之運血     사람 몸에 피가 도는 것과 같다네.
或一暫之止息     혹여 잠시라도 멈추게 되면,
天地亦有時而潰裂 때로는 우주의 질서가 파괴되기도 하지만,
同不死於谷神     곡신과 같이 영원히 죽지 않으니,
實氣母之沆瀣     실로 기모(氣母)의 항해(沆瀣)와 같도다.
故祀典之崇本     그러므로 제사의 법전에서도 근본을 숭상하여,
必先河而後海     반드시 황하에 먼저 제사하고 바다는 뒤로하였다.
思 稱於宣尼     공자가 자주 물을 일컬었던 점을 생각하니,
信子輿之心迪     근본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 맹자의 마음을 믿을 만 하구나.
推 水於習坎     웅덩이를 채우고 난 뒤에 흘러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宜德行之素積     평소에 덕행을 쌓는 것이 마땅하리라.
究人事之下行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연구하는 것이,
根天理之上達     오묘한 이치에 도달하는 근본이 된다.
萬理具於性本     온갖 이치가 다 본성에   갖춰있어,
混潑潑而活活     운용에 따라 모두가 활발해 진다.
隨取用而有餘     필요에 따라 취하여 써도 남음이 있는 것이,
猶窟宅之生出     마치 물이 지하에서 솟아 나오는 것과 같다.
合川流而敦化     작은 덕은 흐르는 냇물 같고 큰 덕은 무궁한 조화를 이루니,
皆大本之充實     모두가 근본을 충실히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配悠久於博厚     무궁한 조화의 덕은 광박 심후한 땅과 대비되니,
歸萬殊於一極     만물의 다양함이 한 가지 이치로 귀결이 된다. 
是誠者之自然     이는 지극한 정성이 자연스레 나타나는 것,
河漢浩而莫測     은하수처럼 아득하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도다.
濬不喩於天淵     그 깊은뜻, 높은 하늘 깊은 연못으로도 다 비유할 수 없어,
但魚躍之洋洋     다만 물고기가 자유롭게 뛰노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發大原於崑崙     큰 근원이 곤륜산에서 발원하여,
彌六合其無方     온 천지 사방에 가득 퍼진다.
巨浸稽天而漫汗   큰 물결 하늘에 닿을 듯이 도도히 흘러가면,
曾不撓以使濁     결코 물길을 바꾸거나 흐리게 할 수 없으며,
火輪 土而爀烈   태양이 땅을 태울 듯이 강력히 내리쬐면,
庸 殺其一勺     누가 한 바가지 물로 그 기세를 꺾으랴!
而君子之致曲     그래서 군자는 선의 한 단서를 미루어 극진히 하나니,
尤有大於立本     이 경우 근본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學不積則不厚     또한 학문이란 쌓지 않으면 두터워지지 않으니,
等聚 而海問     비유컨대 오줌을 받아놓고 바다를 묻는 것과 같다.
苟靈根之不渴     진실로 신령한 뿌리가 마르지 않으면,
沃九土其難      천하를 적시고도 마르기 어려우리,
見寒泉之勿幕     덮어 놓지 않은 샘의 차가운 물을 보라.
人百 其猶若     아무리 퍼내어도 여전하지 않은가!
戒曰             경계하노니,
心以應事         마음으로 세상만사에 대응하면,
百感搖挑         온갖 물욕의 감정이 마음을 흔들고 돋운다.
學以爲本         학문으로 근본을 삼으면,
感罔能擾         물욕의 감정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可汨則無本      물욕의 감정에 빠져 버리면 근본이 없어지며,
可擾則用熄      물욕의 감정에 흔들리면 쓰임이 없어지리라.
敬以涵源        경으로써 그 근원을 함양하고,
本乎天則        하늘의 법칙에 근본해야 하리라.
 




 민암부(民巖賦)

 

六月之交.                    유월어름 홍수의 계절

염여如馬                     양자강 상류에 있는 암초의 물 말처럼 세차게 밀려오네

不可上也. 不可下也      배가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없다네

沓絩哉! 險莫過焉           아아! 이보다 더 험난한 데는 없으리라.

舟以是行. 亦以是覆  배는 물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

民猶水也. 古有說也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 왔다네.

民則戴君.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民則覆國                     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네.

吾固知可見者水也.       나는 진실로 아나니, 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險在外者難狎              위험이 바깥에 있어 좀체 가까이 않는다네.

所不可見者心也           볼 수 없는 건 마음인데.

險在內者易褻              위험이 안에 있어 소홀히 대한다네.

履莫夷於平地              걸어다니기에 평지보다 더 평탄한 곳이 없지만,

跣不視而傷足              맨발로 살피지 않고 다니다간 발을 상하지.

處莫安於임席              이부자리보다 더 편안한 곳이 없지만,

尖不畏而觸目              뾰족한 것을 겁내지 않다간 눈이 찔린다네.

禍實由於所忽              재앙은 소홀히 하는 곳에 있는 법.

巖不作於谿谷              위험은 산골짜기에만 있는 건 아니라네

怨毒在中. 一念甚銳   원한이 마음속에 있게 되면, 한 사람의 생각이 아주 날카롭네

匹婦呼天. 一人甚細      보잘것없는 아낙네라도, 부르짖으면 하늘이 호응한다네.

然昭格之無他               하늘이 감응하는 것은 다른 이유 없어

天視聽之在此               하늘은 이 백성들 통해서 보고 들으니까.

民所欲而必從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건 반드시 들어주기를.

寔父母之於子               부모가 자식 돌보듯 한다네.

始雖微於一念一婦        원한 가진 한 아낙네 비록 애초에 보잘것없지만.

終責報於皇皇上帝        끝내 거룩하신 하늘에게 갚아주기 바란다네.

其誰敢敵我上帝           누가 감히 우리 하늘을 대적하리.

實天險之難濟              실로 하늘의 험함은 통과하기 어렵다네.

亘萬古而設險              만고에 걸쳐 험함이 베풀어 졌거늘

幾帝王之泄泄              얼마나 많은 임금들이 예사로 보아 넘겼던가.

桀紂非亡於湯武.         걸.주가 탕.무에 망한 게 아니라

乃不得於丘民             평범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에 망한 거라네

漢劉季爲小民.            한나라 유방은 보잘것없는 백성이었고,

秦二世爲大君             진나라 호해는 높은 황제였다네

以匹夫而易萬乘.        필부로서 만승의 천자가 되었으니,

是大權之何在            이 커다란 권한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只在乎吾民之手兮     다만 우리 백성들의 손에 달려 있으니.

不可畏者甚可畏也     겁낼 것 없는 듯해도 매우 겁내야 할 존재라네.

희噓哉  蜀山之險.        아아!  촉산의 험준함인들,

安得以掩君覆國也哉? 어찌 임금을 넘어뜨리고 나라를 엎을 수 있으리오?

究厥巖之所自.           그 위험함의 근원을 찾아 보건대,

亶不外乎一人            정말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네

由一人之不良.           임금 한 사람이 어질지 못한 데서

危於是而甲仍            위험이 극에 이르게 된다네.

宮室廣大. 巖之與也   궁궐을 넓고 크게 짓는 일은, 백성들을 성나게 하는 시초요.

女謁盛行.                 여자들이 들락날락 임금을 자주 만나는 일은,

巖之階也                  백성들을 성나게 하는 과정이요

稅斂無藝. 巖之積也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임은, 백성들의 분노를 쌓아 가는 것이오.

奢侈無度. 巖之立也   도에 지나칠 사치함은, 백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킴이요.

捨克在位. 巖之道也  탐관오리가 자리를 차지함은, 백성들의 분노를 이끌어냄이요.

刑戮恣行. 巖之固也   형벌을 멋대로 쓰는 일은, 백성들의 분노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일

縱厥巖之在民.           비록 그 위험이 백성에게 있지만,

何莫由於君德           어찌 임금의 덕에 말미암지 않겠는가?

水莫險於河海.          강이나 바다보다 더 큰 물은 없지만,

非大風則妥帖           큰바람만 없으면, 고요하다네.

險莫危於民心.          백성들의 마음보다 더 위태한 것은 없지만,

非暴君則同胞           폭군만 아니라면 다 같은 동포라네.

以同胞爲敵讐.          동포를 원수로 만드는 건,

庸誰使而然乎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인가?

南山節節. 維石巖巖   남산 저리 우뚝한데, 거기에 돌이 험하게 붙어있고,

泰山巖巖. 魯邦所瞻   태산이 저리 험준하지만, 노나라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네.

其巖一也.                 그 험준함은 한가지라 하지만,

安危則異                  편안해지느냐, 위태로우냐는 다르다네.

自我安之.                 임금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편안하게 되기도 하고,

自我危爾                  임금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위태롭게 되기도 한다네.

莫曰民巖.                 백성들의 마음 위험하다 말하지 마소,

民不巖矣                  백성들의 마음은 위험하지 않다네.

목차


9.상소문

단성소(丹城疏)

선무랑(宣務郞)으로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 조아려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돌아가신 임금님(중종)께서 신이 보잘것없는 줄 알지 못하시고 처음에 신을 참봉에 제수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셔서는 신을 주부에 제수한 것이 두 번이었고, 이번에 또 현감에 제수하시니 신은 떨리고 두려워 마치 큰산을 짊어진 것 같아 감히 인재등용에 정성을 쏟고 계시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하늘의 해와 같은 그 은혜에 감사 드릴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대목이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 큰 골짜기에 버려지는 재목이 없도록 모든 좋은 재목을 다 구해다가 훌륭한 집을 이루는 것은 대목에게 달렸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일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함은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책임입니다. 전하의 인재를 등용하려는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만. 신은 혼자서 걱정되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므로 신이 머뭇거리며 벼슬길에 나가기를 어려워하는 뜻을 전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고 또 학문이 엉성하면서도 어둡습니다. 신의 문장실력은 전날에 과거의 끝자리에도 끼지 못했고, 신의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려고 10년 동안 노력했지만 세 번 실패하고서 그만두었으니 애초부터 지조 있게 과거를 일삼지 않은 사람도 아닙니다. 가령 과거 합격을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조그마한 절개나 지키는 선량한 사람에 불과할 뿐 크게 나라를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훌륭한가 형편없는가 하는 것은 결코 과거에 합격하기를 바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과거를 통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신을 대단하게 보실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이 명예를 도둑질해서 담당관리의 눈을 속였고, 담당관리는 저의 거짓 이름을 잘못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꼭 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또 도가 있는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승도 또한 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됨도 모르면서 그를 등용한다면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될 것이니 그 죄가 어찌 이 보잘것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신이 거짓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팔아 벼슬에 나가는 것이 진짜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보다 어찌 나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이 한 몸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전하를 져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큰 고목나무가 100년 동안 벌레에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 치고 충성스런 뜻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이 없지만, 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워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 거리며 술과 여색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물크러져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직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온 연못 속을 용이 독차지하고 있듯이 합니다.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 벗겨 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 것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없어지고 나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백성을 가죽에 비유한다면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이 자주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하고 밤이면 천장을 바라보고 답답해하며 흐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동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떨어지니 하늘의 재앙은 이미 그 징조를 보였습니다.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구슬퍼 상복을 입은 듯하니 민심이 흩어진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절에는 비록 주공(周公)같은 분의 재주를 겸하여 가진 사람이 대신의 자리에 있다 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풀잎이나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는 신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위로는 만에 하나라도 나라의 위태로운 사태를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들을 보호랄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되기는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그마한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께 벼슬을 얻는다 해도 그 녹을 먹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점이 신이 벼슬하러 나가기 어려워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또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에 일이 있어(왜구의 침략으로 전라도 일대가 함락된 을묘사변을 말함)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때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만,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이 일이 벌써 20년 전에 일어날 일인데도 전하의 신성한 힘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발발한 것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장수 가운데 자격을 갖춘 자가 없고 성에는 수성할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번 사변도 대마도 왜놈들이 몰래 결탁하여 앞잡이가 되었으니 만고에 씻지 못할 큰 치욕입니다. 전하께서는 영묘함을 떨치시지 못하고서 그 머리를 재빨리 숙였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대해서 신하로 복종하던 대마도 왜놈들을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대접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합니다. 원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는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한술 더 뜨십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 때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던 일과 비교하여 오늘날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겉으로 드러난 병에 불과하지, 가슴속이나 뱃속의 병은 아닙니다. 가슴속이나 뱃속 병은 덩어리지고 막혀서 아래위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랏일을 맡은 공경대부들이 이 문제점을 해결해보려고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백성들 가운데 수레가 있는 이들은 수레를 타고 피난 가고 수레가 없는 이들은 달려서 피난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군사를 불러모아 전하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나랏일을 정리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형벌제도 따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극진히 하면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있는바, 그 틀은 전하에게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지요?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나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 있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루라도 능히 새로운 정신으로 깨달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으신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얻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교화도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거행한다면 나라는 고루 잘 다스려질 것이고 백성들은 화합하게 될 것이며 나라의 위기도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일을 판단함에 거울처럼 맑고 거울처럼 공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불교에서 이른바 진정(眞定: 참된 경지의 선)이라 하는 것도 단지 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나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만, 일에 적용할 때 불교는 그 발디딜 곳이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유가에서는 불교를 배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고 계신데 그 불교를 좋아하시는 마음을 학문에 옮기신다면 공부하는 것이 우리 유가의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마치 어려서 집을 잃은 아이가 그 집을 다시 찾아 부모. 친척. 형제나 옛 친구 등을 만나보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더욱이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전하 자신의 경험으로 인재를 선발해 쓰시고 도로써 몸을 닦으십시오. 전하께서 사람을 취해 쓰실 때 솔선수범 하신다면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 만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을 취해 쓰실 때 눈으로 본 것만 가지고 하신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하를 곡이거나 져버릴 무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면 굳게 자기 지조라도 지키는 고견 좁은 신하인들 어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정치를 잘하셔서 왕도정치의 경지에까지 이르신다면, 신은 그런 때에 가서 미천한 말단직에 종사하며 심력을 다해서 직분에 충실하면 될 것이니 어찌 임금님 섬길 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셔서,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 신의 상소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신은 두려워 어쩔 줄 몰라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무진봉사(戊辰封事)

경상도 진주에 사는 백성 조식(曺植)은 진실로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아룁니다.

보잘것없는 신은 더욱 노쇠하고 병이 깊어 입으로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고 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부르는 임금님의 명이 거듭 내려와도 곧바로 달려갈 수가 없고,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 임금을 향한 생각은 간절해도 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임금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겠기에 감히 속마음을 다 쏟아 임금님께 아룁니다.

주상전하께서는 상등 가는 지혜를 타고나셨고 또 정치를 잘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은 진실로 백성과 국가의 복입니다. 정치를 하는 방법은 다른 데서 구할 것 없고, 다만 임금이 착한 것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른바 착한 것을 밝힌다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말함이요, 몸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것은 몸을 닦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 온갖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사오니 인의예지가 곧 그 주체입니다. 온갖 착한 것이 여기로부터 나오게 되니 마음이란 곧 이치가 모여 있는 주체인 것입니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장차 쓰기 위해서이고, 몸을 닦는 것은 장차 도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치를 궁구하는 방법은 글을 읽어 이치를 밝히고 사물에 응함에 있어 그 당연한 길을 구하는 데 있습니다. 몸을 닦는 방법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안으로 마음을 간직하여 홀로 있을 때를 삼가면 큰 덕을 이룰 것이고 밖으로 살펴서 힘써 행하면 왕도정치가 될 것입니다.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고 마음을 간직하고 살피는 큰공은 반드시 경(敬)으로써 주를 삼아야 합니다. 이른바 경이란 가지런히 하고 엄숙히 하여 마음이 깨어 흐릿하지 않는 상태로서 마음을 주재하고 온갖 일에 응하는 것입니다. 경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고 행동을 반듯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한 "자기를 닦는데 경으로써 한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경을 주로 하지 않으면 천하의 이치를 궁구할 수 없습니다. 이치를 궁구하지 않으면 사물의 변화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마치 부부 사이에서 다스리는 실마리가 싹터서 가정과 국가, 나아가 천하를 다스리는 데로 확장되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이치도 단지 착하고 악함을 구분하여 내 몸을 정성스럽게 만드는데 있을 따름입니다.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워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는 것이 또 그 공부하는 차례입니다. 인간의 일은 내버려두고서 하늘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입에 발린 이치일 뿐입니다. 자신에게서 반성해보지 않고 들어 아는 것이 많은 것은 귀 언저리의 학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의 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에는 몸을 닦는 이치가 전혀 없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능히 경으로써 자신을 닦아 하늘의 덕에 통달하고 왕도정치를 행하여 반드시 지극히 착한 경지에 머무를 수 있다면, 착한 것을 밝히고 몸을 닦는 일이 아울러 이루어져 사물과 자신에게 있어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 바탕에서 정치와 교화를 행한다면 마치 바람에 풀이 쓸려 넘어지듯 구름이 몰려가듯 효과가 바로 나타날 것입니다. 위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면 아랫사람 가운데는 그보다 더 열성적인 사람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

왕의 학문은 보통 사람의 학문과 다른 점이 있고, 실행함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구경 가운데 주역은 때에 따라 옳게 행하는 뜻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책입니다. 지금 정사는 임금님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고 은혜로 봐주는 것이 많습니다. 명령은 정상적으로 나오는 것은 없고 모두 어긋나게 나오고, 기강이 서지 않은지 몇 대가 되었습니다. 대단한 위엄으로 떨쳐 일으키지 않으면 갈래갈래 풀어 흐트러진 형세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큰비가 내리듯 적셔주지 않으면 7년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풀을 소생시킬 수 없습니다. 반드시 훌륭한 정승을 얻어 상하가 한 마음으로 협동하여 한 배를 탄 사람들처럼 된 뒤에 라야 이 어지럽고 다급한 현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등용하는 일은 임금님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임금님 자신이 모범을 보여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임금님 자신이 수양되어 있지 않으면 임금님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생길 수 없습니다. 눈이 없으면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 알 수가 없어 사람을 등용하고 버리는 일을 잘못하게 됩니다. 인재를 임금이 알아서 쓰지 못한다면, 임금은 누구와 함께 정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옛날 나라의 형편을 잘 파악하는 사람은 그 나라의 무력이 강한가 약한가를 보지 않고 그 나라가 인재를 잘 쓰는가 못 쓰는가를 보았습니다. 천학 매우 어지러우냐 잘 다스려지느냐는 다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다른 곳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즉 임금이 몸을 닦는 것은 정치가 나오는 근본이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정치를 하는 근본입니다. 또 몸을 닦는 것은 인재를 등용하는 근본입니다. 온갖 훌륭한 말이, 자기 몸을 닦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잘못되면 군자다운 사람이 초야에 있게 되고 소인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옛날부터 권세 있는 신하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거나 외척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은 간혹 있었고 여인이나 내시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도 간혹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서리(胥吏)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정치가 대부에게서 나와도 안 되는데 하물며 아전에게서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당당한 큰 제후의 나라에서 200년 동안 지속해 온 왕업을 많은 공경대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아전들에게 넘겨준단 말입니까? 이런 일은 너무도 부끄러워 소의 귀에도 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군민(軍民)에 관한 여러 가지 정치와 나라의 기무(機務)가 모두 아전들의 손에서 나옵니다. 세금으로 바치는 베나 곡식도 우수리를 더 얹지 않으면 통하지 않습니다. 대궐로는 재물이 모여들지 몰라도 팔도에서는 민심이 흩어질 대로 흩어져 열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각 고을을 아전들 각자가 자기들끼리 할당하여 마치 자기 사유물인 양 문서로 작성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합니다. 각 지방에서 바치던 특산물을 일절 바치지 못하게 하여 지금까지 특산물을 바쳐왔던 사람들은 온 가족이 가산을 팔아 아전들에게 뇌물을 바치는데 100배 정도로 많이 바치지 않으면 아전들이 받지를 않습니다. 한번은 그렇게 바칠 수 있지만 계속 그렇게 할 수 없어 도망가는 사람들이 속출합니다. 어쩌다가 여러 왕조를 거쳐 지속되어온 고을과 백성들이 바친 특산물은 날다람쥐 같은 아전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는지요? 전하가 다스리는 한 나라의 재산이 도리어 아전들의 방납하는 물건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옛날에 나라를 가로챈 왕망이나 동탁같은 간신들도 이런 짓을 한 적이 없고, 망한 나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아전들이 이런 짓을 하고서도 만족하지 않으니 이들은 나아가 임금님의 내탕고 마저도 훔칠 것입니다. 나라에 비축해둔 것이 조금도 없다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임금 바로 아래에 도적이 가득 차 있고 나라는 텅텅 빈 껍데기만 끌어안고 있습니다. 온 조정의 관리들이 목욕재개하고서 멋대로 날뛰는 이런 아전들을 쳐 없애야 합니다. 혹 힘이 부족하다면 사방에 호소해서 왕을 위해서 군사를 동원해야 합니다. 편안히 먹고 자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어떤 좀도둑이 있다면 잡아죽이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만, 아전들이 도적이 되어 각 관청의 아전들끼리 서로 짜고서 나라의 심장부를 차지하여 나라의 혈맥을 해치고 있으니 나라를 망친 뒤에 라야 그칠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라의 법을 맡은 관리들은 따져 묻거나 심문하지도 않습니다. 혹 어떤 관리가 규찰하려고 하면 아전들의 농간에 의해 견책을 받거나 파면되고 마니 뭇 관리들은 팔짱을 끼고서 녹만 받아먹고 아전들의 비위나 맞추며 지낼 뿐입니다.

아전들이 믿는 데가 없다면 어찌 이렇게 기탄 없이 멋대로 날뛸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두고 초나라 왕이 말한, "총애 받는 도둑이 있어 제거할 수 없다"는 격입니다. 약은 토끼가 도망갈 굴을 세 개나 준비하듯이 냇가의 조개가 껍질 속에 몸을 감추듯, 아전들이 남을 해치고 온갖 일을 꾸며대고 있는데도 나라에서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전들과 한통속이 되어 뒤를 봐주고 있는 관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요? 전하께서 벌컥 노하셔서 기강을 떨쳐 재상들을 불러모아 그 원인을 따져 묻고, 임금님의 뜻으로 결단해서 나쁜 무리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백성들의 뜻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언관(言官)들이 처벌해야 한다고 간쟁(諫諍)한 뒤에야 마지못해서 처벌한다면 누가 착한지 누가 악한지 누가 옳은지 누가 그른지를 임금님이 파악하지 못하여 결국 임금의 도리를 잃게 됩니다.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잃고서도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이 밝은 덕을 밝히면 사물을 보는 눈이 거울처럼 밝아지게 되어 비추지 않는 물건이 없습니다. 임금이 그렇게 된 뒤에 덕과 위엄을 가하면 백성들에게 바람에 풀과 나무가 쓸려 넘어지듯 그 영향이 미칩니다. 임금이 바르게 다스리면 백성들은 임금의 명령을 열심히 받들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면 어찌 간사한 사람이 한 사람인들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정치를 어지럽히는 높은 벼슬아치에게는 정해진 형벌이 있습니다. 윤원형 같은 권세 있는 간신도 옳게 처벌했는데 하물며 여우나 쥐새끼 같은 이런 아전들이야 형틀에 그 피를 묻힐 것도 없습니다. 한 차례 뇌성과 비바람이 몰아치듯 한 번 임금님의 위엄을 펴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입니다. 임금이 위에서 몸을 닦으면 아래에서는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벼슬하는 사람 가운데 훌륭한 재상 감이나 부지런히 일하는 인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간신들은 자기들의 뜻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제거하면서도 간사한 아전들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 것은 용납하고 있으니, 이들은 자기 일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깊은 산골에서 쓸쓸하게 살며 아래위로 나라의 형세를 살펴보고 탄식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신은 전하와 군신의 관계를 맺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탄식하다가 눈물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관계는 얕으면서 깊은 관계의 말을 하는 것은 실로 신에게 죄가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건대, 이 몸이 이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으며 살고 있고, 여러 대를 이 땅에 사는 백성인 데다가 외람 되게도 3대에 걸쳐서 임금님이 벼슬하러 나오라고 부른 징사(徵士)가 되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부르시는데 어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주나라의 어떤 홀어미는 베를 짜다가 베틀에 씨줄이 떨어진 것은 걱정하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신이 전날에 상소할 때 바쳤던 '구급' 두 글자에 대해서 전하께서 불 속에서 사람을 끄집어내듯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 급히 서두르신다는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만 "늙은 선비가 강직한 체하려고 해보는 소리일 뿐이니 생각을 움직여볼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하물며 제가 아뢴 임금의 덕에 관한 말이 옛 사람들이 이미 아뢴 말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러나 궤도를 경유하지 않으면 나아갈 길이 없는 법입니다.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고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려고 하면 물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지금 나라의 사정은 신이 전날 상소하던 때보다 훨씬 더 급박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너그럽게 수용하신다면 신은 전하의 용상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꼭 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본 뒤에라야 신을 썼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사람들도 형편을 살펴본 뒤에 벼슬하러 들어간다고 하는데, 전하는 어떤 임금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시면서 한갓 신을 만나려고만 하신다면 헛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사람 알아보는 눈이 밝은지 어두운지에 따라 앞날의 정치에 득실을 예측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임금님께서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삼가 상소하는 바입니다.

목차

출처 : 창산초등학교 19회 동기회
글쓴이 : 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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