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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조씨(昌寧 曺氏) 행열도

cbh하늘 2019. 8. 16. 12:49

 

조  환 (曺  煥),김 민아

사촌형님(조 병윤)의 아들(종질,종잘부)이다

적은 어무이 살아 계실때 어릴적 게임기 들고 게임 모습 한번보고

작은모친 영천군 금호읍 삼호리 필유제 가라골 장지서 근래는 두번본것 같다.

인터넷에 사진 뜨내 골프선수 한다나 건강미가 넘친다.

내가 먼저 아들 나았서면 조 환 할려했다.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읍 세거 조씨(희천공파)

조계룡(曺繼龍)(시조)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사위로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군된 조계룡을 비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추정  족보책 참조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재각..종덕제

 

조겸(曺謙)(중조)

 

고려 태조(太祖)의 사위로 대락승(大樂丞)에 오른 조겸을 1세조로 하여 왔다. 하지만 구보(舊譜)의 대수(代數)가 같지 않아 13세창녕 조씨는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사위로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군된 조계룡을 비조로 하고, 고려 태조(太祖)의 사위로 대락승(大樂丞)에 오른 조겸을 1세조로 하여 왔다. 하지만 구보(舊譜)의 대수(代數)가 같지 않아 13세(世) 소감(小監) 조송무(曺松茂)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영천 입향조인 조신충(曺信忠)은 1383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좌익병마사(左翼兵馬使) 판희천군사(判熙川郡事)이다.

 

추정  족보책 참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송무(曺松茂)(1세)

 

추정  족보책 참조

 

 

 

조신충(曺信忠) 입향조 (송무6세)(희천공파)

 

1383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좌익병마사(左翼兵馬使) 판희천군사(判熙川郡事)이다.

 

고려조의 명신이던 조신충하륜(河崙)·이숭인(李崇仁)·이색(李穡)과 더불어 좋은 벗이었다. 우왕창왕(昌王)이 연달아 폐위되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부인의 고향 경상북도 영천 창수촌(蒼水村)[현 영천시 금호읍] 마단(麻丹)마을로 은거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영천 지역에 세거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드라마 , 용의 눈물,육룡이나류사, 에서  조 민수 (같은 항열,고조 선조 같음)

조민수는 고려 말에 왜구와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운 인물로 문하시중 지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고려 우왕 14년(1388년) 요동정벌군으로 출정해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인물로 해당 시대사는 물론 모든 한국사의 서술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비중을 가지는 역사적 인물이다.

 

 

 

 

 

사효재(思孝齋)

 

 

 

 

(희 천 공 휘 信 忠  묘 도)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종동..고모실)

조 신충의 재각... 사효재(思孝齋),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효재(영천군 금호읍 오계리 147)

 

조상치(曺尙治)(송무7세)(부제학공파)

 

충정공 정재 조상치((忠貞公 靜齋 曺尙治)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경(子景). 호는 정재(靜齋)·단고(丹皐). 태사(太師) 조계룡(曺繼龍)의 후손이며, 전객령(典客令) 조수(曺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정승 조익청(曺益淸)이고, 아버지는 강계병마사 조신충(曺信忠)4남 이며, 어머니는 최중연(崔中淵)의 딸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으로, 1419년(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재감주부(司宰監注簿)가 되었다. 1424년 좌정언에 임명되고 집현전에서 유숙하였으며, 세종·문종·단종 3대를 섬겨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다.

1455년(단종 3) 집현전부제학에 발탁되었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 예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사직하고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791년(정조 15) 단종의 장릉(莊陵)에 배향되고, ‘노산조부제학조상치의 묘(魯山朝副提學曺尙治之墓)’라 새긴 묘비를 세워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혀 충의를 기렸다. 그의 시문은 임종시에 모두 소각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출저]한국민족대백과사전

 

 

한 많은 이 어디 한둘이었으랴..조상치

奉和端宗子規詞..조상치(曹尙治)


子規啼子規啼
두견새야 와 우노 와 울아삿누
夜月空山何所訴
텅빈 산 밤에 달 떠 있는데 뭔 하소연이래
不如歸不如歸
돌아가들 못하구나
望裏巴岑飛欲度
아따..해석이 안뎌
다른 새는 둥지 있어 돌아가거늘
소용치며 봉우리안으로 날아 넘어가려함 ..띠럴이네
看他衆鳥摠眼巢
보이네..타 무리 새들 모두 둥지보고
다른 새는 둥지 있어 돌아가거늘
獨向花枝血忟吐
(힘쓸민 어지러울만)
너는 어찌 홀로 남아 피를 뿌리나
홀로 꽃가지향해 피를 어지러이 토하누
形單影孤貌憔悴
홀로 모슺 외로운 그림자 용모가 초췌하구나
짝 잃은 너의 모습 처량하지만
不肯尊崇誰爾顧
누구라서 외론 신세 생각해주리
鳴呼人間寃恨豈獨爾
사람 원한 어찌 홀로뿐이라 울어삿누
세상에 슬픈 원한 너 뿐이겠니
義士忠臣增慷慨
의로운 선비 충신 강개만 더하구나
비분강개하다 죽은 충신 의사를
억울하고 기막힌 일 셀 수 없으리.

 

 

아따..시 해석 애 먹었네
괜시리 마지막 두 구절..한 많은 원한 너뿐이랴
지나간 시절 비분강개한 많은 충신들..
요 구절 보고 손 집어 넣었다가 짤릴뻔 ㅎ

박상원 한의사글 퍼온글

한의사 이양반도 알고 있는 선조님의 충절 글

인제야 접하니 직계 후손으로 정말 부끄럽네요.

 

영천군 금호읍 삼호리

창주서원사진

 

 

 

충정공 자제비(忠貞公 自題碑)


     노산조부제학포인조상치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墓)

     書魯山朝者明其非今日之臣也   노산조라고 쓴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不書階資者著其無濟君之罪也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       낸 것이며

     書副提學者以其不沒實也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고

     書逋人者言其亾命逋逃之人也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충 정 공 휘 尙 治 묘 도)

 

영천군 대창면 어방동 (능골)

조 상치재각 ..추원제

 

문과(文科)로 부제학(副提學)
 창주서원(滄洲書院), 조상치 신도비(曺尙治神道碑), 희천공 부제학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창주서원(영천군 금호읍 삼호리 855)

 

曺 孟謙(조맹겸),曺叔謙(조숙겸)(송무11세)

 

 

필유재 必有齋

 

 


 묘재인 필유재(必有齋)가 있다.

영천군 금호읍 삼호리(가라골)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曺 卓爾 (조탁이.희천공 ,부제학  분파.僉樞公 첨추공파,송무14세)

 

曺 漢承(조한승)(희천공. 부제학,첨추공파,송무22세,부)

호.善集.생.무진1928.1.15.묘.가라재내

 

필유재(영천군 금호읍 삼호리 219)

  

창녕 조씨 항열도(송무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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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올해조카 조 용환 (曺 龍煥),질부 정 다인 결혼식에는 안온것 같다.

결혼 하는 조카 한테'

아들을 나으면 규,희,재, 자(부수흙 다.) 행렬도에  따라 이름을 지어라 했다.

음양 오행에 의하면

오행

부친이 자에 부수가 물(끝)

물은 나무을 자라게 하고

본인 (중앙) 자에 부수가 나무

나무는 불을 강하게만든다.

아들(끝)자에 부수가 불

불은 흙을만들것 이다

손자(중앙) 자에 부수가 흙

흙은 금을 만들것이며

증손자(긑) 에 부수가 새 자다

금은 물을 낳는다

 

水~木~火~土~金(수~목~화~토~금)

承~秉~煥~圭~鉉(승~병~환~규~현)

이것이 다시 돌며 문중에서 결정한다.

매주 접하는 달력에 음양 오행이 다있다.

 

 

후손들은 문중의 행렬도에 따라 이름을 지어야 할것며

족보 책은 보통30년 한세대 마다 수정하며 공무원은 사무관(5급)이상 되어야 족보책에 이름이 남겨 질것이다 .

 

관 혼 상제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의 4가지 예법

① 관례: 여자의 경우는 계례(笄禮)라고 한다.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상투를 올리고, 여자는 비녀를 꽂는 성인의 의식을 말한다. 시대가 달라져 지금은 이런 절차는 하지 않지만 남녀 20세가 되면 성인식이라 하여 대개는 단체로 성인의식을 올리기도 한다.

② 혼례: 혼인은 인륜대사라 하여 그 의식과 절차가 엄숙하게 이루어진다.
요즘 트랜드가 주례가 없어며 신랑 신부 아버지가 덕담을 하고 신랑 신부 다정한  영상보여주고 대부분 신랑은 춤을

추면서 입장하고 웃음이 나온다.


③ 장례(상례):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루게 되는데 장례일은 삼일장, 오일장, 칠일장 등 장례기간에 따라 명칭을 붙인다. 대개는 삼일장을 치룬다. 삼일이란 기간은 부활, 저승에 갔다가 되돌아오는 기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④ 제례: 장례가 끝나면서 제례가 따른다. 장례 후 제례에는 3일만에 산소에 서 절을 하고 잘 살피는 삼우제 등이 있다. 시대의 변함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다. 그러나 근본정신은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고 경모하는 것이 기본이다.

 

요즘은 3대 징조부 까지 제사 지내는 집안은 드물지만 분명 3대 90년은 조상님들은 자기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불교:부처님의 천상천아 유아독존.윤회사상
기독교,천주교:성부,성자,성령 3의 일체설

밑기전에 옛부터 내려오는

 유교을

재물이 없으면 물한그릇 이라도 뜨놓코

경근한 마음으로 모셔라.

 

 

 보첩(譜牒)이라고도 한다.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부계 중심[1]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인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시초는 중국으로, 제왕연표(帝王年表)라는 황족의 혈통 계보 책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 때 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에서 응시생의 가족 내력을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한반도에 족보가 처음으로 건너온 것은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라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이다. 굳이 조선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도 족보와 유사한 혈통 증명 체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족보가 정착되고 이른바 "양반의 혈통 증명서"로서 역할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한국인의 거의 전부가 소위 족보로 '자신이 양반의 자손임을' 증명 가능하다. "성씨를 가진" 양반은 조선 초기 1%에 지나지 않았으나, 거의 100%로 늘어난 것. 반대로 97%나 되던 평민들의 후손은 아예 없다. 단적으로 신라 김알지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양반이 4백만 명, 전체 인구의 거의 10%나 된다. "양반임을 자처하는" 김, 이, 박, 정씨는 무려 대한민국의 인구에서 2191만 명이나 된다.

현대 한국에 들어서는 대전에 있는 회상사라는 곳에서 현행 족보의 9할 가량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서 제작하고 있다. 여러 종중이나 정치가들의 선물도 많이 받아서 꽤 유명한 곳이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봉건적 유물을 없앤다는 핑계로 다 없애버리고 새로운 것도 제작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조상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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